본문 바로가기
교회사역 제안서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을 가르칩시다.

by 음악노트 2020. 9. 11.

한국사회도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는 차와 같이 쉼 없이 달려오는 동안 그 이면에 따라오게 될 열매가 무엇인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한 민족, 그 나라가 이제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한국교회도 예외는 아닙니다. '(숫자적) 부흥'이라는 것이 진정한 부흥의 의미와 먼 것임에도 여전히 '성장'에 대해 집착하는 듯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러는 동안 교회도 소중한 가치를 많이 잃어버렸습니다. 

 

발전을 위해 달리는 동안 사회나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분별력'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에는 '미디어'라고 하는 강력한 매체가 힘을 실었습니다. 이제는 원하는 것은 '검색'을 통해 어느 정도의 지식 습득이 가능하고, 그 속도는 지역과 시간이라는 제약을 넘어설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조사하고 검사하고 검증하고 하던 작업들을 이제는 '데이터'를 다루는 기계나 도구들을 통해 대신합니다. 더 이상 머리 쓰는 일에 매진하지 않아도 그것을 대신해 줄 도구들이 속속 개발됩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요즘 같이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데에도 그것을 분별하고 가려낼 힘마저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 여러 문제들이 이슈로 보도가 되어도 대부분은 이미 걸러지고 여과된 것들을 접하게 됩니다. - 만약 그렇지 않고 팩트만을 보도한다면 방송사들이나 신문기사의 입장 차이들이 그렇게 나타나지 않겠지요- 여기에서 '공인된 매체'라는 것들이 힘을 가집니다.  '설마 공적인 방송이 거짓을 보도하겠어?'라는 보이지 않는 가림막이 우리의 판단을 가리고, 그 덕분에 마음껏 기사를 쏟아내어도 사람들은 무심코 그런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속는 줄 모르고 속고 있는 부분이 있으며, 조정당하는 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이끄는 대로 소비자가 되어 돌아다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죠. 백화점이나 쇼핑몰 같은 데서 나오는 음악, 그저 분위기를 위해 틀어 놓은 걸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을 더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때로는 소비자의 순환 속도를 빨리 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저한 계산에 의해서 그렇습니다. 매장 내의 진열 방식 또한 그렇지요) 생활 문화가 그 정도라면, 우리가 접하는 미디어 매체의 소식이나, 정치의 내용, 여론 뒤에 충분히 어떤 장치가 있을 수 있다는 의심 한 번쯤은 해 볼 만한 것이 됩니다.

 

교회에서 무심코 듣는 설교의 내용들도 이것에서 피해갈 순 없습니다. 기독교교육의 내용에는 그 이면에 '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틀이 있습니다. 그 틀은 각 교단의 교리와 주장이 담긴 일종의 색깔도 담겨 있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얼마든 할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섣불리 했다가는 공동체가 위험해지는 것들도 존재합니다. 이런 부분들로 인하여 각 교회들마다 입장의 차이가 생겨납니다.

 

이렇다 보니 '일치(연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어느 정도 일치된 의견들을 제시하지 못하고 각자의 판단에 맡기자는 식의 결론을 내기도 하여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국교회 내에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기초적인 신앙훈련 교재'정도 이외에 모든 교단이 함께 일치를 이룬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를.  코로나 사태에 있어, 사회적 거리두기 하나 만으로도 입장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흐름들 속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지도자들'-리더들-입니다. 사회에 대한, 국민에 대한 책임은 정치인들에게 있습니다. 교회에 대하여서는 목회자들이 큰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많이 배우고 학식의 폭도 넓고 깊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게 만드는 것을 보면 그들 중에 참된 실력자, 책임질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래전 민족적 위기를 돌파할 때 지도자들의 모습과 가장 비교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들이었습니다. 둘째, 올바르게 반응할 줄 아는 책임감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셋째, 분별력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수동적 배움'에 익숙해진 시스템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이전과 달리 '의식주'와 같은 생존의 문제가 아닌, 어느 정도 환경이 갖추어진 가정과 세상에서 태어나서 예전과는 다른 시스템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대 간의 갭 gap은 커져만 갑니다. 이런 환경을 돌파하려면 양쪽 모두 분별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봅니다. 수많은 정보의 바다에서 바른 것을 분별하려면 '올바른 사고'와 '치열한 사고'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수준 높은 토론-'싸우는 논쟁'이 아니라 토론-을 통해 함께 추구할 것들을 이끌어 내고, 그에 맞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적용하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사회나 교회라는 공동체의 기틀을 바르게 잡아주어야 합니다. 

 

목회의 현장에 있는 사역자 여러분에게 이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성경부터 바르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목회자들 입장에서, 배운 것을 가지고 해석하고 가르쳐주는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주지 못합니다. 이미 수많은 제자훈련이나 양육 프로그램 등이 가지는 한계만 보더라도 '지식'으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제자들과 함께 보여주신 삶과 가르침의 방식과도 다릅니다. 지금의 방식에는 '삶'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 뿐 아니라 성도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 '물음표'를 던지게 하고, 공중분해시켜보고 그것이 바른 것일 때 어떻게 그것을 살아내고 적용할 것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그것을 살아내어서 자신이 가르친 것이 '진짜'라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은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주님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의 인도하시는 음성이 필요합니다. 바로 이렇게 찾아가는 모습을 오픈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그것을 통해 '아, 문제가 생길 때는 이렇게 해야 하는구나'를 배우게 됩니다. 그렇게 몸으로 살아낸 것만이 '능력'이 되고 '힘'이 됩니다. 이러한 삶을 살려면 결국 '변화받은 사람'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습니다. 

 

진짜 변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믿지도 않는데, 믿는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만들면 안 됩니다. 아이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처럼 성도들도 그렇게 자라 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끌려면 목회자 자신이 먼저 주 안에서 거듭나는 경험이 있어야 하고, 광야의 시험도 겪어야 하고, 연단도 받으면서 신앙의 사춘기와 청년기와 장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경험해야만 합니다. 배우지도 못한 것을 가르칠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래전 선배들은 '성도들은 목회자 자신의 수준만큼만 성장한다'는 소중한 유산을 남겨주셨습니다. 

 

사회도 교회도 참된 개혁이 없는 것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그것을 위해 사람을 바꾸고 제도를 바꾸어도 그 틀이 너무 빈약하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은 위기에 '돈'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됩니다. 그건 아주 단기간만 '꿀'이 될 뿐입니다. 가진 사람들과 지도자들이 본인의 것을 내어 놓지도 않으면서 '빚'을 져서라도 긴급지원을 한다는 것도 사실 웃기는 것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은 우리 사회나 교회에 어디 있는 걸까요? 힘없고 유약한 자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을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보장이 없기에 고민을 하는 것뿐, 조금씩만 가진 것을 나누면 됩니다. 혼자 유지하기 힘들면 같은 업종끼리 뭉쳐서 몸집을 줄이고 협력하여 돌파해 보든 시도도 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누가 그것을 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삶'입니다. 

 

목회 사역자가 할 임무가 여기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를 이끌거나 섬기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과 교회 자체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의 문제, 이웃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본 적은 언제입니까? 우리 교회의 이야기나 설교 주제들에 있어 이웃과 사회, 자연과 환경, (우리나라의 경우) 통일의 문제 등이 얼마나 포함되어 있나요? 하나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혹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것조차 생각 못하는 분별없는 신앙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그동안 '맹인'처럼 산 것은 아닐까요?

 

고민과 사색이 깊어가는 밤에 씁니다.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