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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세리의 마음

by 음악노트 2020. 4. 11.

* 참고: <세리>란, 세금을 거두는 사람(Tax Collector)을 가리키며, 이 글은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 비유]를 모티브로 썼습니다.

 

내 이름은 요셉. 문득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다 할 특별한 사건이 터진 것은 아니지만 굉장히 인상 깊은 장면 하나가 깊이 각인이 된 듯, 아직까지 여운이 남아 있다. 앞으로도 종종 그 이야기를 할 것 같다.  나만의 기록으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펜을 들었다.

 

그날도 쳇바퀴 같이 늘 반복되던 일상의 오후였다. 기도시간이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 성전으로 모여들었다. 갑자기 군중 속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따라 몸을 돌려 보니 손짓과 야유 섞인 눈총을 받으며  한 ‘세금장이’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불편해 하는 주변인만큼이나 그도 마음이 편해 보이진 않았다. 다만 그 눈은 무엇을 찾는 듯 간절해 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일까? 그 발걸음은 빠르게 성전을 향하고 있었다.  기도를 마친 후에도 아마 서둘러 불편한 자리를 뜰 것이 분명하다. 거기에선 그를 환영할만한 이가 아무도 없지 않을테니까. 

 

세리가 자신의 먼지 묻은 발을 성전 안으로 들여놓는 순간, 누군가 그의 옷깃을 건드리며 지나갔다. 바리새인이다! 저들 또한 내게는 세리들 만큼이나 불편한 존재다. 하나님을 믿는 열심과 자선행위 등이 나와 너무 비교가 된다. 더군다나 최근 이 동네를 지나갔던 예수라는 사람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했음에도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열심만큼은 인정했다고 한다. 특별해 보이는 그마저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의롭다고 본 것 아닌가!. 나란 존재는 갖다 대기 어려운 자들 앞에 마음이 확 쫄아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 왠지 씁쓸하다. 

 

바리새인은 그의 곁을 지나 거의 동시에 제단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세리와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세리는 죄인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가까이 하고 싶은 존재는 아니다. 저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은 고사하고 로마의 앞잡이로서 거머리처럼 우리 곁에 붙어 여러 명목의 세금을 매기 고선 피 같은 돈을 쪽쪽 빨아서 가져간다. 누가 그런 인간들과 자리를 같이 하고 싶을까? 정말 뻔뻔하게도 성전에 왔지만, 우리네들의 적대감을 알면서도 제단 가까이에는 감히 갈 수 없었겠지. 암, 그래선 안 되지 말고! 

 

예상대로 재단 구석으로 간 세리는 소리 한 번 제대로 못내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다. ‘무얼 기도하는 걸까?’ 궁금도 했지만 기도시 간인만큼 나 역시 기도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이런,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군!’ 얼마 되지 않아 성전을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바리새인이 기도를 시작한 것이다. 율법을 어김 없이 잘 지킨 것을 자랑스럽게 보고하는 모양이다. 딱 한 가지, 거스리는 말 한마디를 제외하곤 변함없는 기도의 레퍼토리였다. 그 한마디를 빼면 좋았을 텐데, 점차 짜증이 밀려와 기도가 안 되었다. 세리를  썩 좋아하진 않지만 노골적 조롱이나 싫은 내색을 하고 살지는 않았던 나였다. (이제 와서 비밀 하나를 터놓자면, 사람들 몰래 그 세리들과 어울려 본 적은 있었다. 아직 그 생각하면 당황스럽긴 한데, 피땀 흘려 번 돈을 빼앗아 가는 미운 짓 외에는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져서 본의 아니게 누구에게도 말해 본 적 없는 이야기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저들은 우리가 그들을 대하는 만큼 나에 대해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마음을 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거나, 불의를 행하거나, 간음하는 그런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저 세리와는 다릅니다.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하고 소득에서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보이진 않지만 그 바리새인의 얼굴은 마치 아빠에게 칭찬 받으려고 어떤 일을 하고는 달려가 ‘아빠, 나 잘했지?’라며 자랑하는 아이의 그것과 같았으리라. 그건 그렇고, ‘뭐라고??’ 난 귀를 의심했다.‘난 저 인간과 같지 않다’고 한 그 말은 진심인가? 그 한 마디에 그동안 바리새인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낀 이유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다. 모습 뒤에 숨은 저 자랑질이 범인이었다. 

 

문득 지난 때를 생각해 보니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에 어깨를 으쓱했고 자신들도 은근히 그것을 즐기는 것을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뒤이어 번개처럼 스쳐가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경멸감 섞인 눈빛’을 본적이 있다. 그 후부터였다, 저들이 역겨워진 것이. 식사에 초대받은 일도 있었으나 몹시 불편했다. 엄청 큰 자비를 베풀고 있는 양 사람들을 내려보며 흐뭇해하는 웃음을 보니 괜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이 마음이 바람직한 것은 아닌 줄 알지만, 무엇보다, 외면적으로라도 저렇게 못 살면서 그들을 판단하는 나에 대해서 하나님도 그다지 좋게 보시진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표시 내지 않고 정중히 거절해야겠다. 차라리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 같다. 아무튼, 우습게도 저 세리 덕분에 숙제 하나를 풀었다.  (‘아, 또 기도에 집중 못하고 딴 생각을...) 정신 차리고 눈을 슬쩍 떠 보니 구석에 있던 세리가 머리를 푹 숙인 채 엎드려 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상황에 흥미를 느꼈는지 바리새인과 세리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오늘 날 잡았군. 마음까지 불편할 텐데, 그래도 잘 참고 있네’  마음이 괜히 안쓰럽다. ‘어?’ 그런데 그의 얼굴에 눈물 자욱이 있었다. 마음이 상해 눈물샘이 터졌나 보다. 티 나지 않게 그 사람 곁으로 슬쩍 자리를 옮긴 다음 자세를 낮춰 기도하는 체 하며 그의 움직임과 기도하는 소리에 집중해 보려고 애를 썼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야 엎드린 그의 얼굴과 바닥의 틈 사이로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갑자기 그가 몸을 일으키더니 자기 가슴을 마구 두드리며 외치는 것 아닌가!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율법을 오래 배우고 말씀을 외웠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한 번도 머리 아닌 가슴으로 저런 기도를 해 보지 못했다. 그런 기도를 그가 지금 드리고 있엇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토해 놓고 있었다. 우리 동네 랍비들도 기도할 때 저렇게 기도하진 않았다. 물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허공에 재를 뿌리고 그 재를 그대로 받으면서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낯선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 명령을 따라 예배할 때나 절기를 지킬 때, 어떤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속죄를 위해 제사를 드릴 때 애통하며 제 가슴을 치는 것은 우리들도 하는 것이지만, 이런 식으로 어떤 변명도 하지 않고 엎드려 외마디의 기도를 올리는 것은 우리들의 그것과는 뭔가 차이가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성전을 서둘러 빠져 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바리새인 때문에 가진 불편한 이유를 알게 되어 궁금증은 해소 되었지만, 그 대신 다른 생각 하나가 자리를 잡았다. 지금까지는 율법을 근거로 하여 죄를 지은 것을 알게 되면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렸는데, 그날 그는 자기 스스로 죄를 인정하는 그런 종류의 뉘우침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낯설고도 신선했다. 나를 비롯해 세상 사람 누구라도 선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언젠가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있다. ‘너는 네가 진짜 죄인이라고 생각해 본 적 있니?’ 그 때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열심히 선행하려고 사는 선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율법에 나오는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사는 것이 쉽지 않지만, 때론 율법이 너무 엄격해 죄를 짓는 일읊 피하며 많은 것을 절제하며 사느라 스트레스가 여간 아니긴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죄인이냐 묻는다면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렇지, 이런 게 정상이지! 그런데, 그의 회개는 분명 달랐다. 

 

마음 속 질문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 후 여러 명이 세리들에 관한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삭개오’라고 하는 자는 예수라는 분을 만나기 위해 군중들을 뚫고 가까이 가려고 했지만 인원도 많았거니와, 사람들이 그가 가까이 오는 걸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높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단다. 예수님이 그런 그를 보고 집에 하루 묶을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삭개오’는 예수님을 앞에 가면서  ‘제가 만약 남을 속인 것이 있거나, 빼앗은 것이 있다면 그 몇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파격적인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수의 제자 중에도 세리가 있다.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교하고 다니며 사람들의 병도 고쳐 준다고 하는 그 선한 분이 세리들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이런 대우를 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에선 돌 맞을 일이었다. 죄인들과 같이 하는 것은 부정한 것이기도 했다. 머리가 혼란하고 복잡했다. 며칠을 고민했다. 마치 긴 동굴을 지나는 것 같았다, 심하게 엉킨 실타래를 던져 버리지 못하고 풀려고 버둥거렸다. 그 깊은 밤에 질문 하나가 파고 들었다. “세리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한 적이 있는가?’

 

세리의 마음? 왜 그걸 이해해야 하지? 그들은 그저 원수 같고 상종하기 싫은 사람들 아닌가. 지금처럼 참 어려운 때에도 악착같이 돈을 빼앗아 가곤 하는데, 좋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방금 스친 이 질문이 모든 것을 휘어잡고 놔주지 않고 있다. 세리의 마음, 그게 뭐라고. 괜한 고민만 느는 것 같은데. 그렇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세리의 삶을 유추해 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원해서 시작하지 않았다. 태어나 보니 어느 나라, 어느 도시, 어느 마을, 어느 한 부부의 자식이 되어 있었다. 사실 나를 내려다보는 친근한 눈빛을 가진 이들이 ‘아빠 엄마’라는 그 사실을 인식하는 것도 태어나서 한참 시간이 지나 서다. 거기에 생각이 이르자 세리의 삶에 대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세리라는 직업을 가진 것은 물론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중에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들과 달리 극심한 어려움이나 어떤 특수한 환경 때문에 생계를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로 떠밀려가듯 가버린 이도 있지 않았을까? 지난번 만난 그 세리 역시 자기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눈물로 가슴을 치며 기도할 수는 없었겠지. 어쩌면, 그들에 대해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을 공정하게 판단하려면 양쪽 모두 억울하지 않도록 각자의 입장을 다 들어봐야 하는데, 일부만 알면서 전체를 안다고 생각해서는 ‘세리는 모두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것은 아닐까?

 

아무도 그렇게 표현하고 살지는 않지만 내 속에도 순간순간 하나님 말씀과 반(反)하는 감정들이 얼마나 많은가? 미운 사람도 많고, 어려움이 오면 하나님 원망을 한 적도 많다.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거리를 둔 적도 있다. 심지어 그냥 못 생겼거나 내 입장에서 호감 안 가는 외모라는 이유로 선 그은 때도 많았는. 사실 그것도 율법을 보면 죄가 되는 여지가 다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율법이라도 잘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비교가 되니까 불편했던 것이고. 차라리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이 나를 더 이해하는 것 같고 마음도 바리새인보다 넓은 것 같다고 느낀 적이 있었지 않은가! 

 

바리새인, 그들은 율법을 정말 흠도 없이 잘 지키는 이들도 있겠지만 정말 그들의 마음엔 내가 경험하는 그런 마음의 충동이 없어서 기세 등등하게 성전 제단 앞에 나가는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이 안 든다. 성전에서, 그 날, 바리새인이 보인 그 행동에 대해 내가 느낀 불편함은 분명 거기 있었던 사람들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감추며 율법의 행위만을 지키려는 열심을 보이려고 살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왠지  불쌍하기까지 하다.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애를 썼지만 종종 심한 좌절을 느꼈다. 예를 들면, 내가 시험을 잘 봐서 그 시험지를 부모님께 자랑스럽게 내밀었는데, 칭찬은 아주 짧게 하면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훨씬 완전한 사람이 될 거야.’라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다음엔 더 잘해서 좋은 결과를 다시 가져가 보여드렸을 때, 부모님이 기뻐하며 축하해주긴 커녕 '좀 더 하면 여기까지 올 수 있을 거야'라고 하신다면?? 생각만 해도 슬픈 일이다. 하나님을 그런 부모님처럼 느낀다면 어떨까? 정말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을 거다. 

 

저들에게는 그렇게 가까이하기 힘든 하나님이 오히려 세리에게는 가까이 계셨던 것일까? 우리가 가가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그의 얼굴에서 사람들은 뭔가 밝은 기운을 보았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하나님을 만났나? 문득 궁금해졌다. 하나님은 그 날의 일에 대해 뭐라고 하셨을까? (세월이 한참 지나서, 예수라는 분이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았다’고  하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오늘도 글을 적으면서 그 세리를 생각한다. 글에 적힌 문자에 따라 형식을 갖추는 것이 아닌, 마음속에서 진정 자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삶,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지 않는 그런 세상…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예수란 분이 그렇게 우리 곁에서 살아가셨다. 사람들에게 ‘죄인을 가까이하는 죄인’이라는 조롱과 외면을 받으면서도 들과 밥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셨다. 하나님도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기대하셨을 것 같다. 자기의 약점과 단점과 실수와 죄가 드러나도 그 수치가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이 진짜 삶이라는 것을 깨우치시려고 그 날 그들을 우리 곁에 보내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눈에서 먼저 들보를 빼내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에서 들보를 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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