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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역 제안서

'홀로 됨'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

by 음악노트 2020. 5. 8.

어제(5월 7일) 밤 ZOOM을 통해 <한국기독교협회 콜로키움>에 참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대학원 때 기독교교육학 전공을 담당하셨던 교수님께서 페북에서 공지해 주신 덕분입니다. 마지막 학기가 끝나기 전 '교회와 가정과 마을이 함께 하는 교육'에 대해 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님께서도 이번에 그것을 주제로 논문을 쓰시고 발표를 하셨습니다. 

 

자료와 발표를 듣다가 <홀로 됨의 영성>, <어울림의 영성>이란 단어가 떠올라 메모지에 얼른 적었습니다. 교육에 있어 전문 기관은 많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교육기관에 위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로 정착되었고요.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교회학교에 맡기면 신앙도 커지고 믿음 생활 잘할 거라는 무의식적 기대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싼 돈을 들여 학원에 보내는 것도 같은 마음일 겁니다. 시간이 지나 원하는 만큼의 결과가 안 나오면 '맹모삼천지교'의 심정으로 또 다른 밭으로 자녀를 옮겨 심는 일로 이어지겠죠. 

 

바로 이 부분에서 사람들이 실수를 하곤 합니다. 정해진 몇 번의 시간으로는 변화가 오지 않습니다. 예배당에도 1주에 한 번, 그것도 단 몇 시간만 왔다갔다 하는 것으로는 절대 열매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러니까 헌금도 하고, 후원금도 주고, 비용을 지불하고라도 좋은 사역자 구하고 그러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내면의 숨겨진 진실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말할 수 있습니다. 교육에 대해 뿌리부터 잘못되어 있다고 말이죠. 

 

부모의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과 교육이 우선이고, 공부나 자녀의 재능 개발 같은 것에는 도와 줄 사람들이 필요하니 그다음 순서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하나가 더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공동체'의 개념이 많이 약화된 관계로 <마을>이란 것의 의미 역시 과거와 달리 퇴색했는데 이것을 되살려야 합니다.

 

예전엔 동네에서 서로의 사정을 알고 공유할 환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개인의 자유와 인권과 각자의 공간'에 대해 중요시하게 되어 바로 옆 건물, 아파트 옆 집에 누가 사는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단절이 되어 고독사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교육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습니다. 예전에는 (올바른 의미에서의) '어르신'들이 마을에 있어 서로 간 예의를 가르치고 도리를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면 '왜 우리 애한테 그러냐'라고 한 소리 듣기 쉬운 행동이 되어 버렸지요. 

 

이 모든 것을 관찰해 보니 우리가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길이 보이는 것도 같습니다. 부모의 보호 아래 마을과 교회가 함께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돌보는 교육이 시행되어야 하는 것, 그것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예배당에 출석하는 사람들은 거기 출석하기 전부터 이미 누군가의 가족이며, 어느 마을/동네의 공동체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들의 살아온 토대를 이해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을 사람들도 교회가 어떤 곳이며 무슨 일 하는지 관심을 갖고 소통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대화할 '언어'가 생겨납니다. 

 

교회를 처음 갔다가 생각하고 예배를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성경 속 인물의 이름과, 교회 용어들은 낯설게 느껴집니다. 은사로서의 '방언'이 아니라도 교회의 이런 모습은 마을 속에서 '방언'과 같이 동떨어지고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지 않을까요? 한발 먼저 오픈하고 나의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해야 가까워집니다. 예수님은 기다리지 않고서 다가가셨습니다.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반대로, 마을도 그래야 합니다. 자기 자녀들이 학교에서 무얼 배우는지에는 눈을 부릅뜨고 살피지 않습니까? '치맛바람'이란 그런 열정에서 나온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가족 중 누군가 예배당에 간다면 무엇을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근데 너무도 무심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 설마 잘못 가르칠까'하는 마음처럼 관심을 놓으면 안 됩니다. 교회가 어떤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지 판단하고 잘못하는 것은 이야기하고 권면할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서로를 향해 다리를 놓아 소통하면서 자녀와 후손들의 미래, 마을 전체의 발전된 모습을 위해 어떻게 상생하며 살아야 할 지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늦지 않게 찾고 회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기억 속에서 '옛날에는 기독교가 많은 것을 주도하여 발전에 이바지했는데...' 하면서 추억에 남겨져 있으면 안 됩니다. 잃어버린 그것을 찾아야 할 책임이 우리 세대에 남겨진 임무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상상력을 동원해 따라가보면, <홀로 있을 때>와 <어울릴 때>가 잘 조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따르는 공동체로서 독자적인 색깔을 잃지 않아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예배당이 속한 지역사회와 어울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문턱을 낮추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인해 생기는 열매가 무엇인지 보여주어야 합니다. 지역사회의 문을 열고 거기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사건과 이슈가 될만한 것들을 볼 줄 알고 반응하는 삶 또한 살아야 합니다. 상생은 그렇게 시작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그 일을 이루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부모와 마을과 교회가 함께 다음세대를 세운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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